독서노트|2026.02.28

광기의 시대, 한 지식인이 기록한 솔직한 무력감에 대하여

로맹 가리의 자전 소설 『흰 개』를 통해 1960년대 미국의 인종 갈등과 그 속에 투영된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지 않고 비극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작가의 고통스러운 솔직함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울림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광기의 시대, 한 지식인이 기록한 솔직한 무력감에 대하여

프롤로그

2월 독서토론에서 만난 책이다. 흰 개 by 로맹 가리. '자기 앞의 생'이라는 작품을 쓴 프랑스의 유명한 작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책으로는 처음 만났다. 소설이지만 본인의 얘기를 많이 남겨 '자전적 소설'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북 커버

줄거리 및 설정

1960년대 격동기의 미국, 그 혼란한 자리에 프랑스 사람 로맹 가리의 미국 체험이 고스란히 담긴 『흰 개』가 국내 초역되었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2년간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은 흑인과 백인, 개인과 집단, 남성과 여성,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등 각종 대립 구도로 사회 갈등이 한창 고조되었던 격변기 미국에 관한 생생한 현장 보고다. 1968년 2월 17일 폭우가 쏟아지던 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숙소에 손님이 찾아든다. 산책을 나가 며칠이나 소식이 없던 누렁개 샌디가 친구를 데려온 것이다. 잘생기고 건장하며 친절하고 붙임성 좋은 이 회색 독일셰퍼드는 금세 로맹 가리 부부와 가족이 돼 사랑을 받지만, 가슴 깊이 불안함을 야기하는 미심쩍은 면이 하나 있었다. 바로 특정한 사람을 보면 본능적으로 달려들어 살점을 찢으려는 것. 그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부색이 검었다. 1960년대 초,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는 날로 골칫거리가 되어가는 흑인들의 인권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급기야 흑인을 골라 물도록 특수 훈련한 경찰견을 풀기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은 이 개를 ‘흰 개’라 불렀다. 이 책은 로맹 가리가 1960년대 미국에서 겪은 일들에 토대한 자전 소설이다. 흑인을 공격하도록 세뇌당한 ‘흰 개’를 원래의 심성으로 되돌리기 위해 흑인 동물조련사 키스를 찾게 되면서 겪는 인종 갈등, 부부 갈등, 이념 갈등 등 여러 인간 문제가 이 책의 주된 이야기다. 피부색과 이념에서 파생한 광기를 ‘태생적 소수자’로서 맞닥뜨린 주인공 로맹 가리의 고뇌가 냉소적이고 신랄하되 사색적인 어조로 담겼다.

쉽게 읽히지 않음 : 맥락의 부재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책은 196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당시 매우 중요했던 베트남 전쟁, 흑인과 백인간의 인종갈등, 그 과정의 유혈사태 등을 얘기하고 있다. 그 때 그러한 전쟁들로 인해 어떤 정치적인 문제들이 발생했고, 인종 간의 갈등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1980년대에 태어난 이 먼 나라의 사람은 알기가 어렵다.

마킨루터킹 죽음 후 소요사태

그 미묘한 차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책에서 겹겹이 얘기하고 있는 갈등을 온전히 마음으로 이해하기는 좀 힘들었다. 게다가 저 작가의 히스토리를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는 다다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왜 도망치듯 외국으로 떠나간건지, 개는 왜 계속 본인이 안고 있으려고 했던건지 등등.

저자의 뛰어난 구조 분석

자전적 소설로 본인을 앞세운 사람이 쓰기에는 너무 소극적이고 자기 회피적인, 자기 변명으로 느껴지는 게 솔직한 느낌이었다. 소설에서 본인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이 문제를 외부의 구조의 문제로 넘기기도 한다.

외부로 문제를 넘기는건 생각보다 쉬운 해결책이다. 이런이런 구조가 문제여서 이런 결과가 났다, 고 하는 인과론적인 접근은, 그 문제의 주체를 내 밖으로 빼 놓는다. 그 구조에 설령 함께 들어가 있다 한들, '이건 어쩔 수 없어.' 라고 하는 자기 체념적인 어조로밖에 마무리될 수 없는, 얼마나 쉬운 정리인지.

이 책에서는 그러한 구조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헤치기도 한다. 책 곳곳에 표현된 내용들, 예를 들면 흑인들의 상점 약탈에 대한 부분이라던지, 지식인들의 죄의식에 기인한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행동들, 정치인들의 전형적인 부풀리기를 통한 선동이라던지, 이런 내용들은 이 작가가 구조를 파악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약탈은 ‘선동 사회’가 구매 수단은 주지 않은 채 온갖 방식으로 구매를 부추길 때 수많은 소비자들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인구의 대부분을 주변부에 남겨두고 본능적 욕구 나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욕구를 충족하도록 부추기면서 욕구를 충족할 수단은 주지 않은 채 부를 항시 과시하는 사회, 광고와 화려한 진열창과 구미를 돋우는 진열대를 통해 소비 와 소유를 부추기는 사회, 풍요와 항구적인 경제적 팽창을 쫓는 그런 사회를 나는 ‘선동 사회’라고 부른다. p.126

다만, 그 속에서 주인공이 하는 행동은 많지 않다. 어찌 해야할 지를 모르는 모습,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깊은 고민을 더 이상 하지 않는 점들을 보면, 그저 주인공이 무책임하다고만 보인다. 그 주인공은 '로맹 가리' 본인을 얘기하는 거기도 하고.

주인공으로서의 '흰 개'

흰 개

AI 생성. 셰퍼드

이 책의 주인공은 '흰 개' 다. 바트카는 셰퍼트 종으로, 흑인들을 물기 위해 특수하게 훈련된 개인데, 결국 책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 개조를 통해서 이제는 백인을 무는 '검은 개'가 되었다. 사람 나이로는 노인에 가까운 사냥견이라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개에게 훈련 시켰던 것들을, 또 다른 훈련으로 인해서 개조한다는 것이, 과연 이 책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까?

어쩌면 노인과 비슷한 나이의 개도 훈련을 통해 생각을 변화했던 것처럼, 인간들도 훈련을 통해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 같다. 미친 광기의 시대를 드러내는 이 흰 개를 고칠 수 있다면, 자신과 아내의 삶(FBI에게 지독히 추적당했다고 한다) 또한 달라질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수 있겠다.

그런 반면, 결국 공격성을 유지한채 방향만을 달리 하고 있는 '흰 개' 에서 '검은 개' 로 바뀐 바트카의 모습을 보며, 결국 그 폭력성, 본능의 모습을 버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마 인간 본성에 대한 회의, 한계 또한 함께 안고 있는 결말이 아닐까 싶다.

짐승을 사랑한다는 건 꽤나 끔찍한 일이다. 개 안에서 인간을 본 사람은 인간 안에서 개를 보고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인간 혐오에, 절망에 결코 이르지 못한 다.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한다. p.272

"이게 당신이 원한 거야? 처음부터 꾸몄던 거야? 흰 개를 검은 개로 만들려고? 당신이 이겼어, 브라보! 고마워, 이젠 적어도 명예를 잃은 게 우리만이 아니니까!" p.278

평등의 환상과 인간의 본성 사이에서

책 속에서 사회적 평등함이라는 가치를 향해 가고 있는 인간들이지만, 어쩌면 인간이야말로 자본주의 아래서 자본의 불평등함을 통해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은 더 심해지면 심해졌을 뿐. 어쩌면 평등이란 말이야 말로, 허울 좋은 표현일 뿐, 인간의 본성과 반대되는 맞지 않는 옷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작가 본인 또한 그러한 세상에서 방법을 찾지 못하고 도피하고 싶다는 얘기를 한 게 아닐까, 조심스레 느꼈다.

저자의 진정한 강점 : 나약함의 용기

하지만, 결국 로맹 가리는 이렇게 본인의 나약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솔직함을 가졌다. 그것이야말로 이 작가의 이 책에서 크게 평가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나약하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본디의 타고난 미화에 대한 욕구를 버리기 어렵다. 자전적 소설을 통해 '로맹 가리' 라는 한 인간의 나약함을 솔직히 드러낸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사람일 것이다.

토론을 통해 알게 된 그는 굴곡이 많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 무언가 해결책을 제시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테지만 관찰자로써의 이 비극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 자체가 진정한 용기인 것 같다. 실명을 써가며 있는 그대로 기록을 한다는 건 아무래도 큰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인의 이러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인지, '자기 앞의 생'은 가명으로 썼다고 한다.)

에필로그 : 절판, 그리고 독서모임의 의의

이 책은 절판되어서, 도서관이나 이북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다. 우리 시대에는 맞지 않는 얘기도 많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의 뉘앙스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좀 버겁기도 하다. 어쩌면 작가도 자신의 시대에, 이 솔직하게 본인을 드러낸 책을 묻어두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고 혼자 상상해본다.

더불어, 독서모임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곤 한다. 혼자 읽다보면 많은 부분에서 오독하고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왜 이렇게 회피적으로 글을 썼을까?' 라는데서 오는 부정적인 시각을, 저자의 의도와 다양한 시각으로 알아보는 건 책으로 가까이 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 매 책을 그렇게 읽기는 어렵지만, 좋은 책들을 함께 나누는 건 언제나 나를 일깨우는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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