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왕별희 — 슬픈 그의 눈이 그립다
우연히 만난 장국영에게 마음을 뺏기다. 해피투게더에서 패왕별희까지의 여정
너무도 뒤늦게 '장국영'에 빠졌다. 워낙 유명한 작품을 많이 만든 명배우지만, 중화권 영화에 그닥 큰 관심이 없었다. 세상을 떠났을 때도 피상적인 뉴스의 세상으로 만난 장국영이었다. 그 사람의 연기를 찾아볼 생각도 없었고, 내 인생의 밖에 있던 배우, 영화들이었다.
그렇게 40여년을 살다가 우연히 만난 첫 영화는 '해피투게더' 다. 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서로의 사랑을 시험하는 장국영과 양조위. 이 영화를 만난 이유도 '양조위' 였다. 화양연화, 중경삼림은 나의 30대에 만난 새로운 스파크였다. 그 양조위의 영화를 찾다가 OTT에 올라온 영화가 이거였고, 장국영을 처음으로 스크린으로 만났다. 그것도 밤 늦은 시간에 꾸벅꾸벅 졸면서.
분명 양조위를 보기 위해 시작했고, 영화 내용은 기억에서 흐릿해졌다. 그런데, 한동안 생각나는 건 양조위의 상대방 배우였다. 그 상대방 배우의 눈빛이 오래도록 남았다. 몇달이 지나서도 생각이 났고, 그제서야 찾아봤고, 그가 장국영이었다. 대사 하나, 몸짓 하나에도 느껴지는 감출 수 없는 슬픈 눈빛, 외로움, 고독. 모든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고작 한 영화인데, 그가 미친듯이 들어왔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밤은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의 깊이를 모두 느끼기에, 그때의 나는 너무도 어렸다.
슬픔이 가득찬 순간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를 만난 두번째 영화는 '아비정전'. 바람둥이면서 누구에게도 마음을 쉬이 주지 않는 주인공의 역할이었다. 1시간 반 가량의 짧은 영화였다. 왕가위 감독의 그 특유의 이미지로 보여주는 영화에 너무도 완벽한 배우였다. 그 반항적이지만 마음에 담고있는 슬픔을, '다리 없는 새' 그 자체로 보여줬다.

이 장면이 왜 매력있는지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자유로운 영혼
그러고선, 도대체 그의 필모 중 최고의 영화가 뭔지 궁금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의견을 말하지만, 꼭 들어가는 영화가 있었다. 그리고, 장국영 그 자체도 인생에 큰 영향을 받은 영화라고 했다. '패왕별희'. 중국 영화사에도 들어갈만한 손꼽히는 영화. 바쁜 아침, 우연히 검색하다가 극장에서 재개봉을 한다는 걸 봤다. 다음 일정을 생각하지 않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1시간 거리의 극장으로 달려갔다.
줄거리
어려서 북경 경극학교에 맡겨진 두지와 시투는 노력 끝에 최고의 경극배우가 된다. 여자 역할을 맡았던 두지는 시투를 흠모하게 되는데, 시투에게 사랑하는 여인 주샨이 생기면서 방황을 한다. 두지는 아편에 손을 대고, 시투는 주샨에게 빠져 산다. 이를 시작으로 두 남자는 중국의 역사처럼 파란만장한 삶을 시작한다.
영화라는 프레임 속에서 배우들은 자신의 연기를 통해 영화 속 세상을 만들어내고, 관객에게 전달한다. 그 속에서 배우의 연기에 얼마나 몰입할 수 있었는지를 기준으로 배우의 연기력을 느끼곤 한다. 장국영은, 청데이였다. 그저, 청데이 그 자체였다. 더 할말이 없었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몸으로 살아온, 마치 어딘가에 있을법한 인물.
보통은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치밀한 플롯이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장국영이 연기한 청데이만 3시간 보는 영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슬펐다. 그리고, 너무도 잔혹했다. 그 인물이. 장국영이 왜 '패왕별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는지 알겠다. 왜냐면, 장국영이 청데이기 때문이었다.
배우의 연기력이 보인다는건, 그만큼 감독의 연출이 뛰어났음을 말하는 거기도 하다는걸 알고있다. 감독의 인생 최고의 걸작이라고 한다. 천카이거 감독의 다음 연출작들이 점점 하향세를 그린다는걸 봤을 때, 최고 폼의 감독과 배우가 만난 그 순간, 역사에 남을 작품이 만들어졌나 보다.
청데이의 삶은 기구하다. 매춘부의 아들로, 육손이어서 버려지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고, 원하지 않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정체성을 버리고 '우희'라는 여자의 마음으로 살아가고.. 세상은 자신을 우희로 바라봤고, 그렇기 때문에 우희가 되어야만 했다. 나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려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심지어 내 정체성이 뭔지도 알지 못하는 삶을 평생토록 살아간다.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외부와 맞춰가기도 하는 시투와는 달리, 청데이는 평생 우희의 삶을 산다. 슬펐다. 나라는 사람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살아가기 위해 나를 바꿔가야만 하는 한 인간의 고통이. 그래서 청데이는 아편에 빠지기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 아편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직시하는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있는 그대로의 고통 같은거.

너무 장국영 위주로 말했는데, 그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또한 영화를 풍요롭게 만든다. 시투, 그리고 주샨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며 서로 영향을 미친다. 가끔은 가까웠다 또 가끔은 멀어지며, 오로지 본인들의 힘으로만 살아갈 수 없는 그들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중국에서 유일하게 문화대혁명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었던 등소평 집권기에 나온 영화다. 문화대혁명에 대해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댄 장면들이 많다. 이렇게 날카로운 시각을 가졌던 천카이거 감독도 이후에는 선전물을 만드는 데에 그 역량을 쓴것을 보면, 아마 다시는 중국에서 이런 영화가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극장에서 새로 나온 영화를 소비하는 것만큼이나, 이런 명작 영화들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리고, '장국영' 이라는 배우를 큰 스크린에서, 수십년이 지난 영화임에도 만날 수 있어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다. 너무 늦은 나이에 만났기에, 어쩌면 배우 안의 슬픔의 크기를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거 같다. 슬픈 그의 눈이 그립다. 중년의 그는 지금의 양조위처럼 아름다웠겠지, 생각하며. 어느새 23주기를 맞은 그의 죽음을 기리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