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건, 꺼내놓는 쪽이다 - 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
뉴욕타임즈 선정 21세기 최고의 책, 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을 반년에 걸쳐 완독했다. 릴라와 레누, 두 친구가 서로를 '눈부시다'고 부른 이유와 재능을 품는 삶과 꺼내놓는 삶에 대하여. 4천 페이지의 긴 여정을 배웅하는 독서 기록
작년 말이었던가. '뉴욕타임즈 선정 21세기 최고의 책' 이라는 압도적인 찬사에 이끌려 처음 알게 됐다. 물론 처음 읽을 때는 4부작인지도 몰랐고, 그 네 권의 책이 이리도 두꺼운 줄도 모르고 시작했다. 이렇게 긴 줄 알았으면 시작도 안했을, 다 합치면 2500장에 다다르는 장편소설을, 거의 반 년이라는 기간동안 완독했다. 처음에는 '언제 끝나지'에서, 마지막쯤이 됐을때 '헤어지기 싫은' 마음으로.

나폴리 4부작. 커버가 참 예쁘다.
오래된 친구를 만나러 가듯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긴 소설들을 접할 일이 많지 않다. 글이 얇으면 문장의 힘이 와닿고, 길면 서사의 흐름에 이끌리는데, 그 적절한 균형감이 있는 책들을 선호하기도 하고. 책을 읽으면 가급적 다른 책과 섞어읽지 않는, 한권을 끝까지 읽으며 책의 내용과 서사에 완전히 몰입하는 게 더 즐거운 유형이다.
그런 내게도, 이 책은 오래된 친구들과 가끔씩 만나서 안부를 주고받는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졌다. 책 속의 인물들인 레누, 릴라, 엔초, 파스콸레, 솔라라 형제, 니노.. 이 모두는 어딘가에 마치 살아서 내게 조금씩 자신들의 얘기들을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낯선 이름들임에도 이 인물들의 이름과 얼굴까지도 마음속에 그려낼 수 있을 것만 같다. 1권인 '나의 눈부신 친구'를 읽고 한동안 놓았던 책을 다시 잡았는데도, 인물들이 책 속에 그대로 살아 있었다. 그렇게 살아있는 인물의 생동감 때문인지, HBO에서 동명의 드라마가 있었다. 궁금해서 예고편을 봤는데, 내용부터 등장인물들의 모습, 그리고 배경까지 마치 글을 그대로 공간으로 바꾼 것만 같았다.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그 모습을 실제 눈으로 보는건, 좋기도 나쁘기도.
서로의 눈부신 친구
20세기 후반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나폴리라는 공간 속에서 성장하는 레누와 릴라, 두 친구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 책은 긴 길을 묵묵히 달려간다. 어릴적 처음 두 친구가 주고받은 인형에서부터, 결혼과 함께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시간들, 그리고 아이들이 모두 떠나간 뒤의 모습까지를 덤덤하고, 솔직하게 써 내려간다. 레누차의 목소리로.
이 책에서는 릴라가 레누차에게 말한다. 넌 '나의 눈부신 친구'라고. 그리고 그 눈부시다는 말은, 두 친구의 서로를 바라보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릴라에게 레누차는, 레누차에게 릴라는 어떤 존재 였을까. 이 책은 그 수많은 시간들의 말들을, 가끔은 행복하게, 가끔은 매우 아프지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글쓴이인 레누차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보다 뭐든 뛰어난 릴라에게 끝없는 열등감을 느낀다. 언제나 당당하며, 글쓰는 재주도 뛰어난 데다가, 많은 남자들은 릴라를 사랑하게 된다. 심지어 자신이 오랫동안 사랑했던 니노마저 릴라와 먼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성공한 책은 릴라의, 유년기의 자양분에서 피어났고, 이후의 삶에서도 아이를 키우는 삶에서도 릴라는 모든 것들을 원래 입고 있던 옷처럼 소화해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은 릴라의 재능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마음이 휘감을 수 밖에.
하지만 그런 릴라와 레누차가 다른 점이 있다. 릴라는 나폴리를 떠나지 않았고, 부족함을 끊임없이 느낀 레누차는 계속 떠나갔다. 자신의 이름을 쓴 책을 내놓았고, 자신의 얘기를 세상에 꺼냈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진 건 릴라가 아닌 레누차였다. 영원히 자기는 타고난 재능이 없다고 여겼지만, 그 덕에 레누차는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부족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내놓을 수 있었다.
릴라는 그와는 다르다. 모두가 바라봤을 때 릴라는 그 무엇보다 아름답다. 단순히 외모적인 것을 넘어,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가 있다고나 할까. 누가 봐도 릴라가 가지고 있는 재능은 압도적이었다. 뭘 하든 그녀가 손을 대는 것은 아름다워지고, 뛰어나게 변한다. 마음에 드는 모든 것들을 자기 뜻대로 만들 수 있는, 릴라는 유니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릴라는 자신의 틀 밖으로 나서지 못했다. 가지고 있던 틀을 과감하게 깰 기회는 있었지만, 릴라는 나폴리라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세상의 안에서 평생을 바쳤다. 그리고 릴라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은 언제나 타인의 선택에 의한 것들이었다. 새로운 직업을 가질 때도, 구둣공장을 만들때도, 릴라의 선택은 그녀의 세상 안에만 있었다. 그런 릴라에게, 레누차는 '부족하지만 세상 밖에 발을 내딛은 용기있는 친구' 였을까, 아니면 '부족한 줄 모르고 자신을 드러내는 부족한 친구'였을까.
눈부신 건 어떤 걸까
적어도 나는 '눈부신 친구'라는 말을 한 그 순간만큼은 릴라의 진심을 드러냈던 거라고 믿는다. 정말 눈부신 건 어떤걸까? 내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뛰어난 보석이 있다한들, 그걸 내 안에서만 가지고 있으며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걸까. 아니면, 조금 평범한 보석이라 여길지라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일단 꺼내놓는 걸까. 아마도 모든 창작자들의 고민들이 비슷하겠지만, 꺼내놓지 않으면 그 보석은 평가조차 받을 수 없다. 누가 봐도 격동의 삶 그 자체였던 릴라의 삶 또한 레누차를 통해서만 세상에 나올 수 있었으니까.
더불어, 여기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은 모두가 자신의 선택만으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 20세기 후반 나폴리의 빈민가는, 그 시절 그 장소를 벗어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에도 그대로 닿는다. 내가 오롯이 내 삶을 결정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할 다양한 거미줄에 얽혀있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이 책의 모든 인물들의 삶을 다 온전히 그들 선택의 결과라고 하는 건, 복잡한 우리의 삶을 쉽게 단순화 시키는 것과 같은 실수다.
책 속에 나와있는 울퉁불퉁한 삶을 살아가는 그 모든 인물들에 대한 레누차의 시선은 따뜻하다. 그 악랄했던 솔라라 형제에게서도, 레누차의 시선은 단편적이지 않았기에. 모든 사물을 한가지 속성으로 단정지을 수는 없다. 너무 모든 게 내가 결정한 선택의 결과라며, 혼자 무게를 짊어지지는 않아도 된다는 위로를 받는다.
나폴리의 골목골목
엘레나 페란테라는 인물은 누군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나니, 이 작가는 분명 나폴리에서 태어나, 나폴리와 평생을 함께 한 인물일 거 같았다. 문장 하나하나 숨길 수 없는 고향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나폴리 골목골목이 마치 살아숨쉬는 것만 같았다.
여행을 다니며 만났던 나폴리의 길거리를 떠올려 본다. 책의 배경에서 가끔씩 나오던 그 골목길과 광장들이 떠오른다. 베수비오 화산이 보이던 그 풍경들, 북부 이탈리아에 비해 낙후됐지만 바닷가를 끼고 있던 낭만적인 느낌의 도시풍경들이. 이 책을 읽고 갔었더라면, 더 많은 감정들을 느끼며 이 거리를 걸었을텐데. 아는 만큼까지만 보이는 인간의 부족함이란.
책 속의 주인공들도, 이 길들을 걸었겠지. 플레비시토 광장과, 멀리 보이는 베수비오 산.
단연코, 나는 이 엘레나 페란테의 4부작이야말로, 21세기 현대의 고전이 될 것이라고 본다. 현대의 격동적인 역사를 살아가는 인물들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 그리고 그 밑에 살아숨쉬는 애정이야말로, 오랫동안 이 책의 인물들을 마음에 그리게끔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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